빌려준 돈도 전세보증금이 될까요 — 대법원 2001다47535

김대표 인사이트 · 2026년 8월 31일 · 글 김성훈 · 편집 고팀장

집주인에게 빌려준 돈 1억이 있습니다. 못 받고 있던 차에, 그 돈을 보증금으로 치기로 하고 그 집에 전입했습니다. 현금은 한 푼도 오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임차인일까요? 직감은 대개 “아니다”인데, 대법원의 답은 반대입니다.

주택임차인이 대항력을 갖는지 여부는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 제1항에서 정한 요건, 즉 임대차계약의 성립, 주택의 인도, 주민등록의 요건을 갖추었는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므로, 통정허위표시에 의한 계약이어서 무효라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는 별론으로 하고, 기존 채권을 임대차보증금으로 전환하여 임대차계약을 체결하였다는 사정만으로 대항력을 갖지 못한다고 볼 수는 없다.

현금이 안 오간 게 아니라, 상계로 지급된 것입니다

우선 계약서부터 정리하고 갑시다. 임대차는 낙성·불요식 계약입니다. 합의만 있으면 말로도 성립하고, 계약서는 성립의 요건이 아니라 성립을 증명하는 서류일 뿐입니다. 그러니 “계약서도 없는데 무슨 임대차냐”는 질문은 과녁이 빗나간 질문입니다. 계약서의 존부와 무관하게, 물어야 할 것은 합의의 존부입니다.

합의가 성립하는 순간 임차인에게는 보증금을 지급할 채무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 채무는 집주인에게 받을 돈 — 기존 채권 — 과 마주 봅니다. 서로에게 받을 돈이 있는 두 사람. 여기서 상계가 일어납니다. 각자의 채권을 장부에서 맞지우는 것인데, 법의 세계에서 상계는 현금 지급과 똑같은 완전한 변제입니다.

그러니 이 거래에서 현금이 안 건너간 게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지급이 일어났습니다. 판례가 봐준 것이 아니라, 봐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 채권은 소멸했어야 합니다

상계가 일어났다면, 그 순간 채권의 신분이 바뀝니다. 대여금채권은 소멸하고, 그 자리에 보증금반환청구권이 태어납니다. 같은 1억이지만 전혀 다른 채권입니다. 청구의 근거가 소비대차에서 임대차로 바뀌고, 행사할 수 있는 지위도 채권자에서 임차인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소멸한 옛 채권으로는 이제 아무것도 못 합니다. 소송도, 집행도, 청구도. 그 사람에게 남은 권리는 임차인 지위에서 하는 보증금반환청구, 하나뿐입니다.

여기서 판별식이 나옵니다. 전환을 주장하는 사람의 손에 옛 채권이 아직 들려 있는지 보면 됩니다.

그 집에 살면서 여전히 대여금을 청구하고 있다면 — 전환은 없었던 것입니다. 소멸한 채권을 청구할 수는 없으니, 청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멸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10억 채권 중 1억이 보증금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같은 시험대에 오릅니다. 전환이 진짜라면 그 1억은 특정되어 소멸하고, 대여금 청구서의 잔액은 9억이 되었어야 합니다. 잔액이 그대로 10억이라면, 답은 나온 것입니다.

살지도 않으면서 회수를 위해 점유만 하는 경우는 반대쪽에서 무너집니다. 임대차의 본질은 부동산을 거주 목적으로 사용·수익하는 것인데, 그게 없다면 임대차의 껍데기만 있는 것이니까요. 임대차 전환은 자기 채권을 소멸시키는 처분행위입니다. 회수가 목적인 사람은 자기 채권을 소멸시키지 않습니다 — 걸어두고 싶지, 없애고 싶지 않으니까요.

임대차계약의 주된 목적이 주택을 사용·수익하려는 것이 아니고, 대항력 있는 임차인으로 보호받아 기존 채권을 회수하려는 것에 있는 경우, 주택임대차보호법상의 대항력이 없다.
전환의 증거는 계약서가 아니라, 옛 채권의 소멸이다.

판단은 사안마다, 양태를 봅니다

채권의 생사는 대개 등기부에 안 나옵니다 — 나올 때가 있습니다. 전입 이후에도 그 채권으로 소송을 하거나 가압류를 걸어뒀다면, 등기부와 법원 사건기록이 “채권은 살아 있다”는 증명서가 됩니다. 본인도 지울 수 없는 제3자 기록이니, 가장 큰 구멍입니다.

그 밖에는 양태 — 행동의 흔적 — 를 봅니다. 온 가족이 사는가, 방 한 칸만 점유한다는가. 보증금이 시세 언저리인가, 받을 돈 액수 그대로인가. 계약서와 확정일자가 있는가. 대여금 청구와 배당요구 사이를 오가다 불리해지면 철회하는가. 소유자와 가족·채무 관계는 아닌가.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고, 최종 판정은 법정의 몫입니다. 다만 이 흔적들이 한 방향으로 겹치는 물건과 하나도 없는 물건은 입찰가가 같을 수 없습니다. 그 차이를 계산에 넣는 것까지가 입찰자의 일입니다.

거주도 양태의 하나다. 본질은 전환 — 채권이 소멸했는가이다.

본 칼럼의 판례 기준: 대법원 2001다47535, 대법원 2007다55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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